노충현 Roh Choong-Hyun, 다리 아래 Under the Bridge, 2025, Oil on canvas, 72.7 x 91cm

© Courtesy of the artist 

노충현 Roh Choong-Hyun, 새벽 즈음 Near Dawn, 2025, Oil on canvas, 60.6 x 91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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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충현 Roh Choong-Hyun, 가로등 Street Lamp, 2025, Oil on canvas, 60.6 x 91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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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충현 Roh Choong-Hyun, 어슬렁 Wandering, 2025, Oil on canvas, 41 x 32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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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충현 Roh Choong-Hyun, 눈발 Snowfall, 2025, Oil on canvas, 41 x 27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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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충현 Roh Choong-Hyun, 한 낮 Broad Daylight, 2025, Oil on canvas, 53 x 45.5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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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저리의 풍경들


어스름이 내리고 가로등이 하나 둘 켜질 때 즈음, 홍제천을 걷는다. 산책하는 사람들, 물가의 백로, 유영하는 오리, 콘크리트 교각 사이 무성한 풀숲과 나무들…. 같은 길을 걸어도 시선을 두는 곳에 따라 다른 풍경을 보게 된다. 가벼운 두 손과 느린 걸음으로 거닐게 되는 공간이다.

정해진 방향이나 목적 없이 천천히 걷는다는 뜻에서 파생한 단어 ‘플라뇌르(Flâneur)’는 프랑스어로 산책자를 뜻한다. 시인 보들레르는 이를 하나의 개념으로 이론화하여, 단순히 걷는 사람의 뜻을 넘어 도시를 유영하며 삶의 순간을 포착하고 사유하는 사람을 지칭했다. 도시의 관찰자로서 풍경 속에서 새로운 의미를 발견하는 플라뇌르의 미학적 태도는 노충현 작가의 회화와 닮아 있다. 작가는 지속적으로 작가의 삶과 맞닿아 있는 도시 공간을 화폭에 담아 왔다. 공간 속에 직접 들어가 걸으며 시간과 계절의 흐름에 따라 달라지는 풍경을 관찰하고 디지털 카메라에 담는 것에서부터 작업이 시작된다. 수많은 발걸음 끝에 그림은 공간의 미묘한 공기, 온도, 습도를 짙은 농도로 머금게 된다.

2000년대 초부터 한강시민공원을 배경으로 ‘살풍경’ 연작을 작업해오던 작가는 2021년 개인전 ⟪그늘⟫에서 본격적으로 작업실 근처 홍제천의 모습을 담은 작품을 선보였다. 탁 트인 한강과는 또 다른 풍경이 연출되는 내부순환도로 아래 홍제천이 주민들에게 여름의 그늘과도 같은 공간이 되어 주는 것을 보며, 작가는 이전에는 캔버스 안으로 불러오지 않았던 자연물과 밤 등의 소재에 주목하게 되었다. 새로이 붓 끝과 손의 감각을 체화하고 호흡을 맞추어 나가는 과정 안에서 그림 속 세계가 재구성되기 시작했다. 이번 전시의 그림들 역시 인간적이고 정겨운 홍제천의 풍경을 담고 있지만, 동시에 그곳을 걸으며 작가가 느낀 망설임과 선택이 ⟪즈음⟫이라는 제목 아래 녹아들어 있다. 무언가의 주변 또는 근사치를 의미하는 ‘즈음’은 어느 시간, 계절, 장소를 가리킬 수도 있고, 대상과의 마주침 혹은 재회의 순간이 될 수도 있으며, 붓을 놓는 시점을 이야기할 수도 있다. 안온한 계절의 온도와 어슴푸레한 밤의 색채, 수직과 수평의 요소들로 직조된 화면 속 인물과 자연물의 아련한 실루엣 사이에서 제목의 의미는 중첩되며 더욱 풍부해진다.

홍제천의 물길 너머에는 반대편의 길이 있다. 다리를 넘어가면 또 다른 풍경이 눈앞에 펼쳐진다. 전시 공간의 작품들은 홍제천을 가로지르는 사천교 다리 부근을 소재로 상반된 풍경을 그려내며, 한쪽에서는 짙은 녹음이 풍성한 여름밤을, 다른 한 쪽에서는 메마른 한낮의 풍경을 연출한다. 다른 시공간의 풍경과 경계를 넘나들며 한 사람의 발자국으로 공간을 내밀하게 감쌀 수 있는 곳. ⟪즈음⟫은 그런 공간을 담아내고 있다. 촉촉한 공기와 나무 내음이 스미는 그림들 사이를 걸으며, 기나긴 겨울 내내 서늘한 한강 기슭을 서성이다 초여름의 홍제천에 다다른 누군가의 길을 떠올린다. 걸으면서 만나게 되는 풍경은 공간, 시간, 때로는 대상과의 거리에 따라 점진적으로 변화하며, 우리는 그 속에서 수많은 ‘즈음’을 지나친다. 어느덧 걸음을 멈추어 보면 떠나온 곳과는 또 다른 길로 접어들어 있다. 도시의 풍경 속을 걸으며 변화와 사유를 거쳐온 작가의 그림 역시 계절과 계절 사이, 삶의 흐름 속을 지나고 있다. 그림들을 따라 홍제천을 거니는 우리의 걸음이 도착하게 될 곳은 각자의 기억 속 어렴풋한 어느 언저리의 순간일지 모른다.

이시원


노충현(Roh Choong-Hyun, b.1970)은 홍익대학교에서 회화를 전공하고, 동 대학원에서 석사를 취득했다. 개인전 《실밀실》(상업화랑 사직, 서울, 2023), 《그늘》(챕터II, 서울, 2021), 《풍경들의 풍경》(스페이스 윌링앤딜링, 서울, 2020), 《자리》(페리지 갤러리, 서울, 2017), 《자리》(갤러리 소소, 파주, 2015), 《살-풍경(殺-風景)》(국제갤러리, 서울, 2013) 등을 개최했다. 주요 단체전으로는 《서울 오후 3시》(성곡미술관, 서울, 2024), 《이름을 문지르며》(일우스페이스, 서울, 2024), 《히스테리아》(일민미술관, 서울, 2023), 《백 투 더 퓨쳐: 한국 현대미술의 동시대성 탐험기》(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서울, 2023), 《시대를 보는 눈: 한국근현대미술》(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 과천, 2021)이 있으며 이외에 다수의 전시에 참여하였다. 국립현대미술관, 국립현대미술관 미술은행, 경기도 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에 작품이 소장되어 있다.